
흩어지는 찰나를 멈추고 고대의 사유와 미래의 나를 잇는 서사적 실존의 공간
아우구스티누스(시간의 3중 구조), 베르그송(지속과 기억), 플라톤(문자의 영원성) 및 실존적 글쓰기
- 목차
- 서론: 흘러가는 시간의 비극과 펜 끝이 만드는 기적
- 본론: 글쓰기와 읽기가 시간을 가로지르는 철학적 이치
- 1. 아우구스티누스의 ‘현재’와 문자의 기적: 세 가지 시간의 집속
- 2. 베르그송의 ‘지속(Durée)’과 기억: 종이 위에 새겨진 의식의 층위
- 3. 실존적 글쓰기: 시공간을 가로질러 나를 완성하는 영원의 기술
- 결론: 펜을 쥐고 시간을 건너는 무한한 여행자들에게
서론: 흘러가는 시간의 비극과 펜 끝이 만드는 기적
인간은 시간에 갇힌 존재이자 시간의 유대 아래 번민하는 유일한 존재다. 시계의 초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우리가 잡으려 애쓰는 ‘현재’는 입안에 물고 있는 얼음처럼 순식간에 녹아 과거라는 아득한 어비스(Abyss)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우리가 느끼는 삶의 근본적인 애수에 대하여 많은 철학자들은 시간이 가져다주는 불능과 소멸의 경험 때문이라 말해왔다. 흘러가는 모든 것은 사라지며, 한 번 지나간 순간은 그 어떤 물질적 부나 권력으로도 다시 사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 잔혹하고 일방향적인 시간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거룩한 도구를 발명해 냈다. 그것은 바로 ‘글(Writing)’이다.
흰 종이 위에 잉크로 그어 내린 문자들은 단순히 정형화된 기호의 모음이 아니다. 그것은 흐르는 시간을 정지 시키고, 먼 과거의 고통과 기쁨을 현재로 불러오며,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의 누군가에게 내 깊은 내면의 숨결을 전달하는 ‘시간 여행의 장치’다. 우리는 글을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시공간이라는 물리적 감옥의 창살을 부수고 시간을 건너는 비상(飛翔)의 기적을 체험한다.
글이라는 신비로운 통로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건너뛰고, 덧없이 흩어지는 찰나 속에서 영원의 조각을 건져 올릴 수 있는지, 철학적 고찰을 통해 그 깊은 내막을 탐구해 본다.
본론: 글쓰기와 읽기가 시간을 가로지르는 철학적 이치
- 1. 아우구스티누스의 ‘현재’와 문자의 기적: 세 가지 시간의 집속(Focusing)
4세기 고대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시간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뇌 했다. 그는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는 머물지 않고 지나가 버리기에 포착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은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답한다. “시간은 오직 인간의 내면(마음) 속 세 가지 현재로 존재한다.”
즉,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현재, 현재에 대한 직관으로서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서의 현재만이 마음속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바로 마음속에 파편화되어 떠도는 이 세 가지 현재를 하나의 텍스트 위에 찬란하게 ‘집속(Focusing)’시키는 철학적 연금술이다. 우리가 과거의 상처나 추억을 글로 적어 내려갈 때, 이미 지나가 버려 사라졌던 과거는 종이 위에서 ‘지금 살아 숨 쉬는 현재’로 재구성 된다. 또한 미래의 나나 후대의 독자를 향해 적는 문장들은 아득한 미래를 ‘지금 이 순간의 대화’로 끌어당긴다. 글은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시간의 모래알들을 잉크라는 단단한 형상으로 응고 시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내면의 시간을 영원히 멈추어 두는 거룩한 성전이 된다.
- 2. 베르그송의 ‘지속(Durée)’과 기억: 종이 위에 새겨진 의식의 층위
프랑스의 생명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시계가 측정하는 ‘물리적 시간’과 인간의 내면이 느끼는 ‘실존적 시간’을 엄격히 구분했다. 시계의 시간은 1초, 2초처럼 차갑게 끊어지는 공간적 숫자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진짜 시간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감각이 조화롭게 스며들어 이어지는 ‘지속(Durée)’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글 속에서 우리는 이 베르그송적 의미의 ‘지속’을 가장 완벽하게 경험한다. 천 년 전에 쓰인 플라톤의 대화록이나 장자의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사멸한 고대인의 문자를 눈으로 훑는 것이 아니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천 년 전 고대 철학자가 고민하던 의식의 파동과 나의 의식이 하나로 겹쳐지며 순식간에 시공간의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글은 죽어버린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의식과 기억이 냉동 보관되어 있다가, 다음 읽는 이의 시선을 만나는 순간 온기를 되찾고 다시 흘러가는 ‘살아있는 지속의 매개체’다. 펜을 들고 글을 쓰는 자는 종이 위에 자신의 ‘지속’을 정성스럽게 스며들게 함으로써, 먼 훗날 이 글을 읽을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언제든 다시 살아날 생명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 3. 실존적 글쓰기: 시공간을 가로질러 나를 완성하는 영원의 기술
소크라테스는 문자가 들어서면 인간의 기억력이 퇴화하고 진정한 지혜가 손상될까 우려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제자 플라톤이 스승의 말을 글(대화록)로 옮겼기에 소크라테스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곁에서 숨 쉬며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문자는 영혼의 스펙트럼을 담아내는 무쇠보다 단단한 그릇이자 시간의 풍화를 견디는 방주다.
타인의 삶과 비교하며 아웅다웅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깊은 실존적 구원이다.
오늘 밤, 내가 적어 내린 소박한 일기 한 구절은 10년 뒤 지치고 번민하는 미래의 나에게 찾아가 묵직한 위로를 건네는 시공간 초월의 편지가 된다. 또한 수백 년 전 절망 속에서 단어 하나를 적어 내렸을 이름 모를 작가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아, 나보다 앞서 이 길을 걸었던 이도 나와 같은 외로움을 겪었구나”라는 깊은 공감과 함께 시간의 아득한 벽을 허물게 된다. 글 속에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아무런 장애 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무도회를 연다.
결론: 펜을 쥐고 시간을 건너는 무한한 여행자들에게
삶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진 시한부의 여정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역행할 수 없다. 언젠가 우리의 육체는 먼지로 돌아갈 것이며, 우리가 살았던 이 시대의 소란함도 역사의 지층 아래 고요히 묻힐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글’이라는 유일무이한 기적이 남겨져 있다.
글을 쓰고 읽는 자는 결코 시간에 예속된 수동적인 존재로 남지 않는다. 글을 쓰는 순간 당신은 물리적 시계의 초침을 멈추어 세우는 창조자가 되며, 과거의 영혼들과 고요히 담소를 나누는 실존적 여행자가 된다. 당신이 적어 내린 깊은 사유와 진심 어린 문장들은 당신이 세상에 사라진 후에도 종이 위에서, 혹은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빛을 발하며 영원히 시간을 건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흔들리고 일상의 덧없음에 외로워질 때, 조용히 펜을 들거나 한 권의 책을 펼쳐 들자.
그곳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당신이 가장 자유로워지는 거룩한 시간의 문이다. “찰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영원에 다다르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 그것은 바로 글이라는 시간의 배에 우리의 영혼을 실어 보낼 때 완성된다.”
감사합니다.
Author: 엄 태준